볼로가세스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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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볼로가세스 4세는 파르티아 제국의 왕으로, 그의 이름은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왈라가시'를 표기한 형태이다. 그는 미트라다테스 4세의 아들로, 140년경 이후 파르티아를 통치했으며, 카라케네 왕국을 파르티아의 지배하에 두었다. 161년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즉위 후 로마에 전쟁을 선포하여 아르메니아를 침공했으나, 로마의 반격으로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상실했다. 이후 왕위 계승 분쟁이 있었으며, 볼로가세스 5세가 왕위를 획득했다. 볼로가세스 4세의 주화에는 티아라를 쓴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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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로가세스 4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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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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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만왕의 왕 |
통치 기간 | 147년–191년 |
이전 통치자 | 볼로가세스 3세 |
후임 통치자 | 오스로에스 2세 (경쟁 왕) 볼로가세스 5세 (후계자) |
왕조 | 아르사케스 왕조 |
아버지 | 미트리다테스 5세 |
자녀 | 파코루스 볼로가세스 5세 |
종교 | 조로아스터교 |
이름 |
2. 명칭
볼로가세스는 그리스어와 라틴어에서 파르티아어 '왈라가시'(𐭅𐭋𐭂𐭔|Walagašxpr)를 표기한 형태이다. 이 이름은 현대 페르시아어로는 '발라시'(Balāsh), 중세 페르시아어로는 '왈라크시'(Wardākhsh, Walākhsh)로도 표현된다. 어원은 확실치 않으나, 페르디난트 유스티는 최초의 형태인 왈라가시가 '힘'(varāda)과 '잘생긴'(gaš) 등의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볼로가세스 4세는 파르티아 서부를 지배하던 미트라다테스 4세의 아들이었다. 볼로가세스 3세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140년경 이후 볼로가세스 3세가 파르티아의 대부분을 지배했으나, 볼로가세스 4세는 볼로가세스 3세 사후 그 권력 기반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트라야누스 황제의 침공 이후 영향력을 상실했던 카라케네 왕국을 다시 파르티아의 산하에 두었다.
3. 재위
150년/151년, 볼로가세스 4세는 카라케네(메세네)의 아르사케스 가문 출신 통치자 메레다테스를 제압하고, 그의 친척으로 보이는 오라바제스 2세를 새로운 카라케네의 왕으로 임명하였다. 볼로가세스 4세의 군대는 카라케네 왕가의 수호신인 헤라클레스 석상을 가져와 셀레우키아에 있는 아폴론 신전에 두어, 볼로가세스 4세의 승리를 선전하는 전시물로 사용되었다. 이 동상에는 볼로가세스 4세의 카라케네 정복을 설명하는 그리스어 및 파르티아어, 2개 국어로 된 비문이 새겨졌다.
161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새로운 로마 황제가 되자 볼로가세스 4세는 갑작스럽게 로마에 전쟁을 선포했는데, 이는 로마-파르티아 전쟁에서 파르티아가 먼저 전쟁을 선포한 유일한 사례이다. 볼로가세스 4세는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로마의 종속국 왕이었던 소아이무스를 자기 아들인 파코루스로 대체했다.
동시에 파르티아가 시리아를 예기치 않게 공격하면서, 그곳에 있던 로마군은 패배했다. 자신감이 충만했던 볼로가세스 4세는 162년에 로마 측이 보낸 강화 제의를 거절하였다. 161-166년의 로마-파르티아 전쟁이 파르티아 측에 순조롭게 시작되긴 했지만, 로마군이 초기의 충격과 패배에서 회복한 뒤 반격을 가하여, 163년에 소아이무스를 아르메니아 왕위에 복위시켰다. 같은 시기에 파르티아군은 에데사를 점령하고 와엘을 허수아비 왕으로 세웠다.
파르티아군은 164년에 시리아에서 축출되었고, 두라에루로포스를 상실하며, 여러 파르티아의 봉신들이 볼로가세스 4세를 배신하게 되었다. 165년 혹은 166년에 파르티아의 수도 셀레우키아와 크테시폰이 로마의 장군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에게 함락되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로마 군단들이 메데아와 아디아베네를 공격했다. 하지만 로마 측은 166년 셀레우키아에서 발생한 역병으로 많은 피해를 보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안 되어 전쟁이 종결되었고, 볼로가세스 4세는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로마에 넘겨주어야 했다.
현대 역사가 마이클 소머가 '재앙적인 군사적 실패'라고 칭한 파르티아의 패전 뒤에도, 연대기에는 불안이나 반란에 대한 기록이 없다. 이는 볼로가세스 4세가 정치적 안정을 유지했음을 나타낸다. 파르티아는 메소포타미아 북부 대부분을 상실했고, 하트라가 새로운 서부 지역 국경 지대가 되었다. 하트라는 '말카'(malka, 영주)라는 지위를 가진 파르티아의 봉신들이 다스렸다. 그러나 볼로가세스 4세는 도시의 전략적 중요성이 높아짐에 따라 하트라 가문의 지위를 왕으로 올려주고, 일부 제식과 전통 종교 의식을 허용해주었다. 180년에 소아이무스가 죽자, 볼로가세스 4세의 아들이 볼로가세스 2세(재위: 180년-191년)라는 이름으로 아르메니아 왕위를 차지했다.
볼로가세스 4세의 치세는 190년 오스로에스 2세의 반란으로 흔들렸다. 오스로에스 2세는 메디아의 엑바타나에서 자신의 주화를 발행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볼로가세스 4세의 아들 볼로가세스 2세가 그의 뒤를 이어 볼로가세스 5세로 즉위하며 오스로에스 2세를 빠르게 진압한 것으로 보인다.
3. 1. 파르티아 왕위 계승
190년 메디아 지방에서 오스로에스 2세가 왕위를 주장하며 독자적으로 코인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한편 바빌로니아에서는 볼로가세스 5세가 191년 볼로가세스 4세의 죽음 전후로 왕위를 선언했다.
결국 볼로가세스 5세가 왕위를 획득하게 된다.
3. 2. 카라케네 정복
150/51년에 볼로가세스 4세는 카라케네(메세네)의 아르사케스 가문 출신 통치자 메레다테스를 제압하고, 그의 친척으로 보이는 오라바제스 2세를 새로운 카라케네의 왕으로 임명하였다. 볼로가세스 4세의 군대는 카라케네 왕가의 수호신인 헤라클레스 석상을 가져와 셀레우키아에 있는 아폴론 신전에 두어, 볼로가세스 4세의 승리를 선전하는 전시물로 사용되었다. 이 동상에는 볼로가세스 4세의 카라케네 정복을 설명하는 그리스어 및 파르티아어, 2개 국어로 된 비문이 새겨졌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인들이 온 지 462년 (서기 151년)째에 미트리다테스 국왕의 아들인 왕중왕 아르사케스 볼로가게스께서 메세네의 이전 왕 파코루스의 아들인 미트리다테스에 대항하여 메세네로 원정을 이끄셨으며, 미트라다테스가 메세네에서 쫓겨난 뒤에, 모든 메세네인들의 통치자가 되셨으며, 폐하가 직접 메세네에서 가져온 이들의 이 헤라클레스 동상은 청동 문을 지키고 이는 아폴론 신의 성소에 놓이게 됐다.|그리스인들이 온 지 462년 (151년)째에 미트리다테스 국왕의 아들인 왕중왕 아르사케스 볼로가게스가 메세네의 이전 왕 파코루스의 아들인 미트리다테스에 대항하여 메세네로 원정을 이끌었으며, 미트라다테스가 메세네에서 쫓겨난 뒤에, 모든 메세네인들의 통치자가 되었으며, 메세네에서 가져온 헤라클레스 동상은 청동 문을 지키는 아폴론 신의 성소에 놓이게 됐다.grc
3. 3. 로마와의 전쟁 (161년-166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161년에 새로운 로마 황제가 되자, 볼로가세스 4세는 갑작스럽게 로마에 전쟁을 선포했는데, 이는 로마-파르티아 전쟁에서 파르티아가 먼저 전쟁을 선포한 유일한 사례이다. 볼로가세스 4세는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로마의 종속국 왕이었던 소아이무스를 자기 아들인 파코루스로 대체했다.
동시에 파르티아가 시리아를 예기치 않게 공격하면서, 그곳에 있던 로마군은 패배했다. 자신감이 충만했던 볼로가세스 4세는 162년에 로마 측이 보낸 강화 제의를 거절하였다. 161-166년의 로마-파르티아 전쟁이 파르티아 측에 순조롭게 시작되긴 했지만, 로마군이 초기의 충격과 패배에서 회복한 뒤 반격을 가하여, 163년에 소아이무스를 아르메니아 왕위에 복위시켰다. 같은 시기에 파르티아군은 에데사를 점령하고 와엘을 허수아비 왕으로 세웠다. 공식 왕이던 마누 8세는 로마 제국으로 망명해야 했다. 파르티아군은 164년에 시리아에서 축출되었고, 두라에루로포스를 상실하며, 여러 파르티아의 봉신들이 볼로가세스 4세를 배신하게 되었다. 로마군은 165년에 에데사를 포위했으며, 이 기간에 에데사의 시민들은 파르티아 수비 병력을 학살했고 로마군에 문을 열어주었다. 로마군은 에데사에 입성했고 마누 8세를 오스로에네의 통치자로 복위시켜주었다. 그는 또한 '필로로마이오스'(Philorhomaios, '로마인들의 친구')라는 별칭을 얻었다.
165년 혹은 166년에 파르티아의 수도 셀레우키아와 크테시폰이 로마의 장군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에게 함락되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로마 군단들이 메데아와 아디아베네를 공격했다. 하지만 로마 측은 166년 셀레우키아에서 발생한 역병으로 많은 피해를 보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안 되어 전쟁이 종결되었고, 볼로가세스 4세는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로마에 넘겨주어야 했다.
3. 4. 이후의 통치와 왕위 계승 분쟁
현대 역사가 마이클 소머가 '재앙적인 군사적 실패'라고 칭한 파르티아의 패전 뒤에도, 연대기에는 불안이나 반란에 대한 기록이 없다. 이는 볼로가세스 4세가 정치적 안정을 유지했음을 나타낸다. 파르티아는 메소포타미아 북부 대부분을 상실했고, 하트라가 새로운 서부 지역 국경 지대가 되었다. 하트라는 '말카'(malka, 영주)라는 지위를 가진 파르티아의 봉신들이 다스렸다. 그러나 볼로가세스 4세는 도시의 전략적 중요성이 높아짐에 따라 하트라 가문의 지위를 왕으로 올려주고, 일부 제식과 전통 종교 의식을 허용해주었다. 180년에 소아이무스가 죽자, 볼로가세스 4세의 아들이 볼로가세스 2세 (재위: 180년-191년)라는 이름으로 아르메니아 왕위를 차지했다.
볼로가세스 4세의 치세는 190년 오스로에스 2세의 반란으로 흔들렸다. 오스로에스 2세는 메디아의 엑바타나에서 자신의 주화를 발행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볼로가세스 4세의 아들 볼로가세스 2세가 그의 뒤를 이어 볼로가세스 5세로 즉위하며 오스로에스 2세를 빠르게 진압한 것으로 보인다.
4. 주화
볼로가세스 4세의 테트라드라큼 앞면에는 가쪽에 불이 달려 있는 반구형의 티아라를 쓴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는 또한 귀 양쪽을 덮는 목 덮개를 하고 있다. 드라크마 앞면에선, 볼로가세스 4세는 뿔이 없는 티아라를 하고 있다. 볼로가세스 4세는 주화에 티아라만을 하고 있는 최초의 파르티아 군주이기도 하다. 볼로가세스의 청동 주화의 뒷면 일부에는 독수리가 묘사되어 있으며, 이는 왕의 영광을 뜻하는 흐바르나와 관련되어 있다. 에데사/오스로에네의 짧은 기간 재위했던 국왕 와엘의 주화 앞면에도 볼로가세스 4세의 주화가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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